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됨

로이드존스 성경교리 강해시리즈2-제16장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생명의 질을 알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칭의'라는 단어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확인해 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 역사에서 칭의(Justification)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의 교리'를 설명해 보는 것은 우리를 시험해 보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역사적으로 루터도 칭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운데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칭의에 대한 견해는 우선 죄악들을 용서함을 의미하며 그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그들은 더 나아가 우리안의 내재된 죄를 제거해야 하고, 칭의의 안에 적극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는 과정을 더하며, 이것은 세례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교회에 의하면 칭의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범죄로 인해 주입된 은혜가 상실 될 수도 있으며, 고해성사를 통해서 또 연옥에서 재획득의 과정도 존재합니다.
   루터는 이런 견해들이 전혀 비성경적이며 거짓된 것미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의 커다란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럼 루터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요? "칭의란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며 공언하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며 돌리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가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실수는 칭의란 우리가 의롭게 하며 선하게 혹은 바르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성화와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잘못에 대항해서 이것이 진실로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칭의는 법정적이며 선언적이라는 점이 바로 성경이 선포하는 바임을 살펴봅시다. 출 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으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을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 이런 판결문들은 두 분쟁자들의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선언을 해야만 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 칭의는 정죄에 반대되는 것으로, 양자가 다 법정적 문제이며, 어떤 경우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3:20~28 안에 칭의의 의미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0~34에서도 이 위대한 진술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칭의가 정죄의 반대라는 것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칭의에는 부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칭의에서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저의 죄들이 덮어졌고 용서받았다는 것, 즉 그 죄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적극적인 요소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점에 더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거나 우리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수동적 순종을 하시기 전에 구속의 한부분으로 율법에 대해 적극적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롬 3:20~22, 롬 10:4, 고전 1:30, 고후 5:21, 빌 3:9. 칭의로 말미암아 타락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 것을 의미하므로 이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칭의는 전적으로 용서 그 이상이며, 우리는 주님의 완전하고 흠없는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1. 칭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이며, 성화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2. 칭의는 우리 밖, 법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성화는 우리의 내적 생명, 즉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3.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며,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 하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4. 칭의는 단 한번의  영원한 행위이며,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은혜와 지식 속에서 자라갑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비성경적입니다. 또한, 우리가 현재의 상태와 조건에서 범죄했을 때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칭의는 어떻게 발생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엡 2:9, 롬 4:5. 우리는 우리의 칭의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단지 칭의를 알고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칭의와 믿음의 관계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며 정죄당해 마땅합니다. 믿음을 활용하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면 구원은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의해서(by)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 이후로 율법은 버려져 더이상 요구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실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사도들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며, 그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시킨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저를 구원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입니다. 저의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의 미묘한 위험을 아시겠습니까?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의가 저에게 올 수 있는 통로이며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탄생을 주십니다. 또 믿음의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엡 2:8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약 2:14~26 에서 야고보가 '행위로'라고 말하고 있으며, 롬 4장에서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두사람은 모두 칭의의 질문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특성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행위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이며,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나는 구원받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살도록 그 믿음이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살핌으로써 당신의 믿음의 참됨 여부를 당신 스스로 시험하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야고보와 완전히 동일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우리들을 위해서 이해해야 할 위대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들을 믿을 수 있도록 저를 부르시며 또한 믿음의 선물을 의해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제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완전하고 흠없고 점없는 의의 옷을 저에게 입혀 주셧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 교리입니다.

by lafidos | 2008/06/30 08:48 | 읽기 | 트랙백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사무엘상30:1~6, 사무엘상서에서 중요한 두 사건으로 사울의 울음과 다윗의 울음을 꼽을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의 통치 밖의-스스로 살아가는- 존재의 한계를 느끼며, 자신이 추구하고 욕심내었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절망하며 통곡한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어떠한가? 우리의 쉽게 하는 대조와는 달리 다윗의 울음도 사울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자책과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통곡한다. 다윗도 삶을 통해서 골리앗을 죽일 때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신앙을 지켜오지 못하였다. 적국으로 망명하였고, 도적질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신앙적인 타협을 하였고, 이는 영혼의 큰 짐이었다. 이는 신약에서 배드로의 통곡과 비교된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여러절에 걸쳐 베드로의 부인을 열거하고, 나중에 스스로 통곡하는 그를 기록하였다.
    왜 우는 것일까? 자기의 역부족, 소원대로 되지 못한 억울함때문이다. 이 억울함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 두셨다는 억울함이요, 제발 신앙인으로서 이런 처지에까지 만은 이르지 않기를(최소한의 체면을 지키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재를 감수해야 하는 외로움과 고통과 무응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가 이를 풍성히 증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적 침체기",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명칭을 붙여 놓기도 하였다.
     성경의 증언을 보면, 시88편에서 하나님의 외면으로 망하고 잊혀진 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0~12에서는 이제 응답하셔도 시가가 늦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다른 시편들은 환란중에 낙담하였으나, 하나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셨습니다, 할렐루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시에서는 무응답을로 맺고 있다. 왜 이런 결말로 끝맺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알지 않으시는 것 같은, 영원히 응답하지 않으실 것 같은, 영적 침체기, 영혼의 밤을 가르시치기 위함이다.
     시편22:1~8,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인데, 나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현실이요, 마땅히 지나가야 하는 필요한 신앙의 과정이다. 루터는 "잦은 고통의 심연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알 수 있었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생각하게 하는 자리-십자가를 생각하게 하는-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십자가란 무엇이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예수께서 우리, 죄인-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도망가서 사망의 그늘에 앉은-을 위해 오심으로 겪는 것이고, 하나님 부재의 자리에 찾아 오심으로 생긴 단절이다. 따라서, 하나님 부재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의식할 뿐인 것이다.
     시42편(1~6)에서 또 다른 힌트를 얻는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 갈급함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주시는 것, 행하심에서 얻는 유익으로부터 하나님을 목적하는 갈급함으로 인도되고 있다. 이들의 고백처럼 "하나님만 나를 돌아보신다면......" 하는 자리에 기어코 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발견하는 구원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달라"라고 표현되어 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시길 바라시지, 우리가 쓸모있기를 바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이 갖는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의 윤리성과 유용성을 뛰어 넘는, 인격적 관계의 최고의 핵심인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이를 배우는 자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얻는 현실적인 보상들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인간의 진실한, 최종적인 가치가 뭐냐하는 자리에까지 몰고 가시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을 이렇게 몰고 가시며, 이는 정당한 신앙의 인도함을 받는 길이다.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더 깊이 찾아 오시고 계신 것이다.
   그 인도함의 끝을 생이 끝나기 전에 맛볼 것을 보증한다고 하시며 기도해 주시다. 친구들과 나의 삶가운데 외로움과 힘든 것 호소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은 때가 많았다. 왜 그럴까 반문해 보게 될 때 듣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인도하심의 끝까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놓지 않으실 것을 소망하며......

by lafidos | 2008/06/04 04:22 | 듣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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